종교로서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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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법명사 댓글 0건 조회 718회 작성일 14-06-04 15:05본문
종교로서의 불교
제 2절. 종교로서의 불교
1. 철학이냐 종교냐
불교는 철학이지 종교는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이는 주로 그리스도교 신학자들로부터 나오는 견해이다. 신에 대한 신앙을 핵심으로 하지 않고 그저 인간의 깨달음을 궁극적인 목표로 한다는 것이 그런 견해의 주된 근거이다. 그러나 이것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서구의 유일신 종교 문화를 준거로 해서 종교를 규정한 데 입각한 이야기일 뿐이다. 유태-그리스도교 전통의 유일신 신앙을 준거로 하는 종교 개념을 적용하면 그 전통 이외의 것은 모두 종교가 아닌 것이 된다. 특히 불교를 비롯해서 유교, 도교, 힌두교 등 동양의 주요 종교전통들을 모두 종교의 범주에서 제외하게 된다. 그것은 자기 문화 중심주의의 독단일 뿐
이다. 마루 종(宗), 가르침 교(敎)자를 합쳐서 만든 종교라는 말은 아마도 서양의 religion이라는 단어의 번역으로 창안된 것이겠지만, 종(宗), 교(敎), 학(學) 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지금 우리가 쓰는 종교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렇게 보면 불교, 유교, 도교 등을 종교가 아니라고 함은 어불성설이요 오히려 서양 종교를 종교가 아니라 religion이라고만 불러야 할 것이다.
어느 저명한 기독교 신학자는 기독교를 이제 더 이상 종교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하였다. 기독교 이외의 온갖 잡다한 종교현상을 다 싸잡아 종교라고 불러대니 그 말을 더 이상 기독교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그런 잡다한 종교들과 같은 반열에서 취급될 수는 없으니, 종교라는 말을 이제는 주어버리고 기독교는 기독교라고만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religion이라는 말을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로 쓰고 싶어하는 문화적 독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종교와 철학을 근본적으로 구분하려는 시각 자체가 동양 종교 전통에는 걸맞지 않는다. 신에 대한 신앙을 종교라 하고 이성으로써 관찰하고 사유함으로써 지식을 얻는 것을 철학이라고 구분하는데, 동양 종교 전통에서는 워낙 그런 식의 구분이 의미가 없다. 세상과 인간의 궁극적인 진상[宗]을 체득하고 그것을 가르치며[敎] 배우는 데[學] 이성을 동원하느냐 신앙을 통하느냐 하는 선택이 있을 수 없다.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배움, 수행을 불퇴전이게 해주고 이성이니 감성이니 오성이니 하는 것을 다 동원한 전인적 체득으로써 믿음의 내용을 확인하며 그 구현을 위해 매진하는 것이니 종교와 철학이 한 묶음인 것이다.
앞에서 종교의 구성 요소들에 대해서 이야기한 데에서 드러났듯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에는 이미지적 탐구의 측면이 들어 있다. 그리고 아무리 세상과 인간에 대한 종교적 지식의 대전제를 초월적, 초경험적인 계시나 깨달음에서 찾는다 하더라도, 그 지식의 추구와 정리에는 내내 이성이, 철학적 사유가 작동하는 것이다. 다만, 철학은 철저히 이성만으로 지식을 추구하고 정리하며 이성이 가 닿을 수 있는 곳 너머는 인정치 않는 반면에, 종교는 처음부터 그 너머까지를 포함하는 점에서 다르다. 그리고 불교가 처음부터 이성 너머의 마당까지를 포함한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깨달음이란 지적 활동이 아
니다. 오히려, 이성으로 획득하는 지식의 족쇄를 벗어나는 데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불교가 철학만은 아닌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지식보다는 실천에 두는 비중이 크다는 데 있다. 철학에서 중시하는 실천이란 이성을 통해서 경험적으로 관찰한 것을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즉 모순이 없이 정연하고 일관된 지식 체계로 정리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세상과 인간의 진상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따라가 보면, 어느 만큼까지는 대단히 논리정연하고 명증적이지만 결국에는 논리적으로 모순되고 역설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게 된다. 중도(中道)를 비롯해서 연기(緣起), 공(空), 3신불(三身佛)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핵심 개념들이 다 그렇다. 그런 대목에서 나오는 표현이 부사의(不思議)라든가 묘(妙)하다는 말이다.
논리적 모순 속에서도 그대로 가르침의 실천을 밀고 나갈 것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교의가 보살도(菩薩道)이다. 보살이라는 개념 자체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깨달은 중생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불교인의, 적어도 대승불교인이 당장의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실천하여 구현하려는 삶이 그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보살도이다. 보살도의 실천 항목인 6바라밀다(六波羅密多)을 보아도 그렇다. 그 중의 첫 번째인 보시(布施)만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주는 사람, 받는 사람, 주고 받는 물건, 이 3가지 상(相)에 매임이 없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하라고 한다. 그러니 모든 상을 여읜 각자(覺者), 붓다만이 완벽한 보시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보살은 붓다가 아니어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 모순을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은 불교의 신행에서 별로 의미가 없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그 너머의 종교적 이상을 산다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는 모순이지만, 실제로 가장 현실적으로 벌어지는 종교적 신행은 그밖에 어디에선가 따로이 논리 정연하게 이루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다.
불교도 여느 종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적 질병을 진단하고 그에 대한 처방을 내리는 데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또 하나 불교가 철학만은 아닌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철학도 그에 관심을 둘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런 "실용적"인 관심이 철학의 우선적인 초점이 되지는 않는다. 더욱이, 철학은 세상과 인간에 대한 자비를 원동력으로 하지는 않는다. 지적 호기심이 철학의 일차적인 원동력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지적 호기심은 이른바 불도(佛道)에 이르는 방편적 통로는 될지언정 불도(佛道)를 걸어 가는 데에는 별무소용이다. 논리적으로 모순되므로 지적 호기심을 여지없이 좌절시키는 실천 항목들을, 모순이든 말든 온몸으로 이행해 나가는 것이 불도를 걷는 걸음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불교의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는 3귀의(三歸依)에서 불교의 종교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깨달은 이, 즉 붓다와, 그의 가르침과,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에 귀의한다는 것인데, 귀의라는 것이 이미 종교적인 행위이다. 자기의 모든 것을 거기로 돌려 의탁하는 것이 귀의이다. 지적으로 아직 확인을 못했더라도 믿음으로써 거기에 자기를 전적으로 투여한다는 것이니 철학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제 2절. 종교로서의 불교
1. 철학이냐 종교냐
불교는 철학이지 종교는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이는 주로 그리스도교 신학자들로부터 나오는 견해이다. 신에 대한 신앙을 핵심으로 하지 않고 그저 인간의 깨달음을 궁극적인 목표로 한다는 것이 그런 견해의 주된 근거이다. 그러나 이것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서구의 유일신 종교 문화를 준거로 해서 종교를 규정한 데 입각한 이야기일 뿐이다. 유태-그리스도교 전통의 유일신 신앙을 준거로 하는 종교 개념을 적용하면 그 전통 이외의 것은 모두 종교가 아닌 것이 된다. 특히 불교를 비롯해서 유교, 도교, 힌두교 등 동양의 주요 종교전통들을 모두 종교의 범주에서 제외하게 된다. 그것은 자기 문화 중심주의의 독단일 뿐
이다. 마루 종(宗), 가르침 교(敎)자를 합쳐서 만든 종교라는 말은 아마도 서양의 religion이라는 단어의 번역으로 창안된 것이겠지만, 종(宗), 교(敎), 학(學) 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지금 우리가 쓰는 종교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렇게 보면 불교, 유교, 도교 등을 종교가 아니라고 함은 어불성설이요 오히려 서양 종교를 종교가 아니라 religion이라고만 불러야 할 것이다.
어느 저명한 기독교 신학자는 기독교를 이제 더 이상 종교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하였다. 기독교 이외의 온갖 잡다한 종교현상을 다 싸잡아 종교라고 불러대니 그 말을 더 이상 기독교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그런 잡다한 종교들과 같은 반열에서 취급될 수는 없으니, 종교라는 말을 이제는 주어버리고 기독교는 기독교라고만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religion이라는 말을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로 쓰고 싶어하는 문화적 독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종교와 철학을 근본적으로 구분하려는 시각 자체가 동양 종교 전통에는 걸맞지 않는다. 신에 대한 신앙을 종교라 하고 이성으로써 관찰하고 사유함으로써 지식을 얻는 것을 철학이라고 구분하는데, 동양 종교 전통에서는 워낙 그런 식의 구분이 의미가 없다. 세상과 인간의 궁극적인 진상[宗]을 체득하고 그것을 가르치며[敎] 배우는 데[學] 이성을 동원하느냐 신앙을 통하느냐 하는 선택이 있을 수 없다.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배움, 수행을 불퇴전이게 해주고 이성이니 감성이니 오성이니 하는 것을 다 동원한 전인적 체득으로써 믿음의 내용을 확인하며 그 구현을 위해 매진하는 것이니 종교와 철학이 한 묶음인 것이다.
앞에서 종교의 구성 요소들에 대해서 이야기한 데에서 드러났듯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에는 이미지적 탐구의 측면이 들어 있다. 그리고 아무리 세상과 인간에 대한 종교적 지식의 대전제를 초월적, 초경험적인 계시나 깨달음에서 찾는다 하더라도, 그 지식의 추구와 정리에는 내내 이성이, 철학적 사유가 작동하는 것이다. 다만, 철학은 철저히 이성만으로 지식을 추구하고 정리하며 이성이 가 닿을 수 있는 곳 너머는 인정치 않는 반면에, 종교는 처음부터 그 너머까지를 포함하는 점에서 다르다. 그리고 불교가 처음부터 이성 너머의 마당까지를 포함한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깨달음이란 지적 활동이 아
니다. 오히려, 이성으로 획득하는 지식의 족쇄를 벗어나는 데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불교가 철학만은 아닌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지식보다는 실천에 두는 비중이 크다는 데 있다. 철학에서 중시하는 실천이란 이성을 통해서 경험적으로 관찰한 것을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즉 모순이 없이 정연하고 일관된 지식 체계로 정리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세상과 인간의 진상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따라가 보면, 어느 만큼까지는 대단히 논리정연하고 명증적이지만 결국에는 논리적으로 모순되고 역설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게 된다. 중도(中道)를 비롯해서 연기(緣起), 공(空), 3신불(三身佛)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핵심 개념들이 다 그렇다. 그런 대목에서 나오는 표현이 부사의(不思議)라든가 묘(妙)하다는 말이다.
논리적 모순 속에서도 그대로 가르침의 실천을 밀고 나갈 것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교의가 보살도(菩薩道)이다. 보살이라는 개념 자체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깨달은 중생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불교인의, 적어도 대승불교인이 당장의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실천하여 구현하려는 삶이 그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보살도이다. 보살도의 실천 항목인 6바라밀다(六波羅密多)을 보아도 그렇다. 그 중의 첫 번째인 보시(布施)만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주는 사람, 받는 사람, 주고 받는 물건, 이 3가지 상(相)에 매임이 없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하라고 한다. 그러니 모든 상을 여읜 각자(覺者), 붓다만이 완벽한 보시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보살은 붓다가 아니어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 모순을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은 불교의 신행에서 별로 의미가 없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그 너머의 종교적 이상을 산다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는 모순이지만, 실제로 가장 현실적으로 벌어지는 종교적 신행은 그밖에 어디에선가 따로이 논리 정연하게 이루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다.
불교도 여느 종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적 질병을 진단하고 그에 대한 처방을 내리는 데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또 하나 불교가 철학만은 아닌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철학도 그에 관심을 둘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런 "실용적"인 관심이 철학의 우선적인 초점이 되지는 않는다. 더욱이, 철학은 세상과 인간에 대한 자비를 원동력으로 하지는 않는다. 지적 호기심이 철학의 일차적인 원동력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지적 호기심은 이른바 불도(佛道)에 이르는 방편적 통로는 될지언정 불도(佛道)를 걸어 가는 데에는 별무소용이다. 논리적으로 모순되므로 지적 호기심을 여지없이 좌절시키는 실천 항목들을, 모순이든 말든 온몸으로 이행해 나가는 것이 불도를 걷는 걸음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불교의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는 3귀의(三歸依)에서 불교의 종교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깨달은 이, 즉 붓다와, 그의 가르침과,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에 귀의한다는 것인데, 귀의라는 것이 이미 종교적인 행위이다. 자기의 모든 것을 거기로 돌려 의탁하는 것이 귀의이다. 지적으로 아직 확인을 못했더라도 믿음으로써 거기에 자기를 전적으로 투여한다는 것이니 철학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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