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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범스님─관세음보살의 가피와 위신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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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법명사 댓글 0건 조회 1,161회 작성일 14-06-0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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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의 가피와 위신력♣
종범스님

「관세음보살 보문품」 게송 부분을 중심으로 관음신앙의 네 가지 상념, 칭명, 예배, 공양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관음신앙의 실천 방법 중 첫째는 상념(想念)입니다. 항상 관세음보살님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앉으나 서나, 오고 가고, 쉴 때나 일할 때 늘 관세음보살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칭명(稱名)입니다. 늘 관세음보살 명호를 부르는 것으로“ 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예배(禮拜)입니다. 관세음보살님께 항상 절을 하는 것으로 1배, 2배, 백배, 천배…, 이렇게 자꾸 관세음보살님을 향해서 예배를 올리는 것입니다.
넷째는 공양(供養)입니다. 관세음보살님께 꽃과 향, 과일, 곡식 등을 정성껏 공양 올리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 보문품」을 보면 상념, 칭명, 예배, 공양 등 네 가지의 관음신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게송 부분에 상념과 같은 내용으로 상원(常願)과 상청앙(常聽仰)이란 말이 나오는데 상원은 항상 관세음보살님께 발원한다는 뜻이고 상청앙은 관세음보살님을 늘 우러러 보고 공경하고 사모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관세음보살 보문품」의 경문과 게송 부분이 서로 보충해서 관음신앙에 대한 원만한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 보문품」게송을 살펴보면 중생에게는 여러 가지 환란이 닥쳐 고통을 겪는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장애, 마장, 업장 등 많은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데 그 성격을 보면 밖에서 일어나는 장애가 있는가 하면 안에서 일어나는 장애도 있습니다. 밖에서 일어나는 장애는 바람의 재앙(風災), 물의 재앙(水災), 불의 재앙(火災), 감옥을 면치 못하는 옥살이 재앙도 있고 도둑떼를 당하는 재앙, 전쟁터에 나가는 재앙 등이 있습니다.
반면 안에서 일어나는 재앙은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세 가지 독성, 즉 탐독[貪]과 진독[塵], 치독[置]이라고 하는 삼독(三毒)과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라는 여섯 가지 티끌 때문에 본래 깨끗한 마음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겁니다. 즉, 중생이라고 하는 것이 삼독에 중독되어 있는데 마음속에 독이 섞여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욕심내는 마음, 화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이 섞여 본래 청정한 심성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 삼독은 내부적으로 독성이고 재앙이기 때문에 심각하며 이 세 가지 독성에서 자유롭게 되면 성불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불교는 옛부터 인도의 재래적인 방식에 의해서 출가· 삭발하는 법도가 있습니다. 출가를 한다는 것은 색성향미촉법이라는 육진(六塵, 여섯 가지 티끌)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며 삭발은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사고방식을 바꾼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가령 중생들은 밖의 세력이 좋아지면 행복하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권력이라든가 재물의 세력, 사람의 세력을 쫓습니다.

결혼을 할 때도 며느리, 사위를 잘 얻으려 하고 똑똑한 자식을 낳으려고 하는데 이것이 사람의 세력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서로 마음만 통하면 된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부모님과 부딪칩니다. 그러나 몇 년만 지나게 되면 스스로 판단이 잘못됐다, 혹은 자신이 너무 무모했나 보다 하면서 후회도 하고 반성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요. 나이 많은 분들은 그렇지 않죠.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기성세대의 사고방식입니다. 어른들은 현실적인 세력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자식이 택한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한사코 반대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을 잘 맞아야 행복하다,재산이 많아야 행복하다’ 혹은 권력이 있어야 행복하다 하는 마음이 중생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범부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사람, 재산, 권력을 중심으로 보는데 부처님이 깨닫고 보니까 아무리 사람을 잘 만나도 마음에 독성이 있는 한 행복하지 않다는 겁니다.
권세가 있어도, 재물이 많아도 마음에 독성이 있는 한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밖으로 펼쳐진 세력에 의해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자신의 마음을 돌려서 행복을 찾겠다는 생각을 갖는 것, 이것이 사고방식의 전환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바꾼다는 의미로 머리를 깎는 겁니다. 바로 삭발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뭇 중생들은 여전히 밖에서 무엇인가를 구해서 행복해지려고 합니다. 결국 도를 닦는다는 것은 마음을 바꾼다는 것임을 모두가 알아야 합니다. 마음의 세 가지 독성은 매우 심각한 것이어서 한 번 중독되면 제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탐독이 가장 심각합니다. 한용운 스님의 『님의 침묵』을 보면 그 안에는 많은 시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선사의 설법’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한용운 스님은 시를 통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선사의 설법을 들었다. 그 선사는 말했다. 애욕을 멀리 여의면 자유와 기쁨이 있다고 큰소리로 말했다.” 사실 애욕을 멀리 여의게 되면 사랑과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고 기쁨과 평화로운 마음이 찾아드는 게 사실입니다.

모든 고통과 괴로움이 애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데서 출발하지요. 계속해서 시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선사는 어지간히도 어리석었습니다. 그 애정에 집착을 여의는 것은 죽는 것보다 어리석은 것을 그 선사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즉, 애욕을 멀리 여읜다는 것은 이룰 수 없는 대안이니까 제시를 하나마나라는 거죠. 애정에 대한 집착을 여읠 때는 평화와 자유와 기쁨이 찾아오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따라서 애정에 집착을 여의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줄을 그 선사는 모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용운 스님은 불교의 세계도 알고 중생의 세계도 알아서 불교의 방향을 제시하고 중생의 아픔도 함께 달래주는 그런 시를 쓰고 있는 셈이죠.
불교 사상과 문학성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기에 고전이고 명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의 자비(慈悲)와 위신력(威神力)은 밖에서 일어나는 재앙과 안에서 일어나는 재앙을 물리칠 수 있는 방편입니다. 이것이 관음신앙의 근본입니다.

몸이 아프다든지 하는 것은 밖에서 일어나는 재앙입니다. 밖에서 일어나는 재앙과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재앙도 함께 물리치는 것이 관음신앙입니다. 게송 부분에는 재앙의 여러 가지 사례, 즉 재앙의 항목들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재앙들을 어떻게 물리치느냐 바로 염피관음력(念彼觀音力)으로 물리칠 수 있다고 게송은 들려줍니다.

상념, 즉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을 생각함으로써 물리친다는 거죠. 관음력, 즉 관세음보살의 능력이 나에게 어떻게 오느냐? 바로 내가 관세음보살을 생각할 때 온다는 거예요. 그게 생각 념자(念)예요. 관세음보살에게는 무궁무진한 힘이 있고 우리는 그 관음력을 생각함으로 인해서 밖의 재앙과 안의 재앙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흔히 관음신앙의 영험이라고 하지요.

예를 들어 음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영양가는 별로 없지만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기호식품과 영양가가 높은 영양식이 있습니다.
기호식품은 몸에 이롭지는 않지만 기분을 좋게 만들고, 영양식은 살이 되고 피가 되고 기운을 돋게 하는 음식입니다. 젊을 때는 기호식을 좋아하게 되고 나이들면 영양식을 하게 됩니다.
입에만 좋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영양가 높은 음식이라도 그냥 놔두면 나한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문제는 먹어야 된다 이겁니다. 먹으면 도움이 됩니다. 관음신앙도 그런 원리예요.

관세음보살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능력이 있고 자비가 있고 원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두면 나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죠. 내가 생각을 해야 됩니다. 염피관음력, 즉 내가 관세음보살님의 위신력을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래된 암실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곳은 항상 어둡겠지요. 그러나 문만 열면 태양이 항상 밝게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태양이 그토록 밝지만 암실은 항상 어둡습니다.
문제는 밝은 햇빛을 어두운 방안으로 어떻게 끌어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간단합니다. 문만 열면 되는 것이죠. 문을 열면 태양을 맞이하게 되고 그러면 암실은 순간 사라지게 됩니다. 염(念)이 그런 의미입니다. 즉, 높은 산이 있으면 올라가야지 산은 산대로 홀로 높고 나는 나대로 늘 밑에 있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신앙이라는 것도 상념, 늘 생각을 하면 그 생각이 인연의 고리가 되어 위신력을 나한테로 오게 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삼독과 육진 안에 둘러싸여서 밖으로 보이고 들리는 데만 정신이 팔려 마음의 능력을 발휘하지 않습니다. 마치 사람의 능력은 수도관과도 같습니다. 물이 수도관에 차 있는데 항상 닫혀 있어서 안 나오는 거죠.
그럴 때 수도꼭지를 열면 물이 바로 흘러나오게 됩니다. 사실, 수도를 틀어서 나오는 게 아니죠. 늘 물이 흐르게 돼 있는데 중생들 스스로 막아놨을 뿐입니다. 막아 놓은 부분만 제거하면 본래 흐르는 모습으로 되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삼독과 육진은 말하자면 수도꼭지를 막아 놓은 상태와 같은 이치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생각하면 꽉 막아놓은 수도꼭지를 열어놓은 상태가 되는 것이기에 본래대로 물이 흐르는 모습, 즉 염피관음력으로 장애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불가사의한 점입니다.

관음신앙은 물질과 물질로써 설명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생각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기에 불가사의한 면으로 설명되는 내용입니다.

[종범스님 법문(2)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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