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지혜로운 삶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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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법명사 댓글 0건 조회 1,010회 작성일 14-06-04 15:05본문
지혜로운 삶의 선택
법정 스님
자연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고 사람이 기댈 영원한 품이다.
또 자연은 잘못된 현대 문명의 유일한 해독제이다.
하늘과 구름, 별과 이슬과 바람, 흙과 강물, 햇살과 바다, 나무와 짐승과 새들,
길섶에 피어있는 하잘 것 없는 풀꽃이라도
그것은 우주적인 생명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건성으로 보지 말고 유심히 바라보라.
그러면 거기에서 자연이 지니고 있는,
생명이 지니고 있는 신비성과 아름다움을 캐낼 수가 있다.
모든 것이 다 필요한 존재이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 필요한 것이다.
어떤 생물이 됐든 필요하기 때문에 생겨났다.
그런데 그것이 귀찮다고 해서 농약으로, 강한 살충제로 죽여보라.
그 생물만 없어지는 게 아니고 그것이 연쇄반응을 일으켜서
우리에게 진짜 없어서는 안 될 이로운 것까지 모두 사라진다.
오늘 이 생태계의 이변과 환경 문제, 또 지구 온난화 문제,
이것이 다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가 전체적인 흐름과 조화를 모르고 어떤 부분적인 것에 갇혀서
그것만 지나치게 소비하고 낭비하고 혹사시키다 보니까
지구 자체가 인간들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저기 털어내고 재채기도 하느라고
지구는 지진도 일으켰다가 또 사방에 불도 일으키는 것이다.
지구 표면에 사는 인간들이 마치 물것처럼 하도 귀찮게 구니까 털어내느라고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지구가 무엇인가.
우리가 기대고 있는 생명의 바탕이다.
우리만 살고 지나갈 생명의 장소가 아니다.
영원히 존속되어야 할 생명의 터전이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우리가 너무도 지구를 함부로 대했기 때문에
그 보상으로써 지금과 같은 여러 재난과 이변이 오는 것이다.
세상을 돌아보면 인간인 내 자신이 우울하고 착잡해진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짐승보다 나을 게 어디 있는가.
삶의 가치를 어디다 두고 살아야 할 것인가.
일찍이 세상을 떠난 우리의 조상들이 오늘의 우리를 보고
주저없이 당신네 후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런 물음을 스스로 던지게 된다.
흔히 우리가 짐승만도 못하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짐승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일이다.
짐승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이 지금 이렇게 타락하고 있지 않은가.
새삼스레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일직이 흙을 가까이 하고 살던 농경사회에서는 감히 상상 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미국의 철학자 마르쿠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풍요로운 감옥에 비유하고 있다.
감옥 속에 냉장고와 세탁기가 갖춰져 있고 텔레비전 수상기와 오디오가 놓여 있다.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풍요로운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어떤 것이 진정한 인간이고,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근원적인 물음 앞에 마주 서야 한다.
그런 물음과 대면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없다.
항상 자신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고,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무엇보다도 사람답게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첫째, 자기 자신에 대한 각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각성, 자기 존재에 대한 각성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 각성을 통해서 비로소 마음이 열린다.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이미 열려져 있는 세상을 내가 받아 들일 수 없다.
다시 말해 세상과 내가 하나를 이룰 수 없다.
세상과 내가 하나를 이루지 못하면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라는 파도 위에서 겉도는 것에 불과하다.
마음이 열려야만 세상과 내가 하나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마음이 열려야만 평온과 안정을 이룰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나는 누구인가.
자신의 속얼굴이 보일 때까지 묻고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 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물음 속에 들어 있다.
그러나 묻지 않고는 그 해답을 이끌어낼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거듭거듭 물어야 한다.
모든 것은 세월의 풍상에 씻겨 시들고 허물어져 간다.
거죽은 늘 변하기 마련이다.
불교 용어로는 ‘무상하다’는 말이 있다.
모든 것은 무상하고 덧없다.
항상하지 않고 영원하지 않다.
늘 변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다.
만일 이 세상이 잔뜩 굳어 있어서 변함이 없다면 숨이 막힐 것이다.
변하기 때문에 환자가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고,
가난한 사람이 부자로 살 수도 있는 것이고,
오만한 사람이 겸손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어두운 면이 밝아질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변해 가느냐에 달려 있다.
자신의 중심을 들여다 봐야 한다. 중심은 늘 새롭다.
거죽에 살지 않고 중심에 사는 사람은
어떤 세월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허물어지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이 원초적인 물음을 통해서 늘 중심에 머물러야 한다.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각성을 추구해야 한다.
사람이 또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나눠 가질 줄 알아야 한다.
이웃은 나와 무관한, 전혀 인연이 없는 타인이 아니다.
그들은 내 분신이다. 또 하나의 몸이다.
왜냐하면 한 뿌리에서, 생명의 커다란 한 뿌리에서 나누어진 가지가
바로 이웃이기 때문이다.
내 자신은 그 한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내 이웃이란 또다른 가지이다.
나눠가짐으로써 내 인간의 영역이 그만큼 확산된다.
열린 눈으로 사물을 대해야 한다.
모든 일은 내가 공들여 뿌려서 거두는 것이지 거저 되는 일은 없다.
이것은 우리들이 일상적인 일을 통해서 수시로 경험하는 일이다.
이 세상에 저절로 되는 일은 없다.
내가 뿌려서 거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주의 질서이다.
이런 우주의 질서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며칠 전에 겪은 일이다.
나는 다른 일도 그렇지만 농사일에 서툴다.
채마밭이 있어서 이것저것 심었는데 밖에 나들이갔다 돌아왔더니
봄에 뿌린 씨앗들이 다들 시원치가 않고 고추와 케일과 해바라기,
이 세가지만 아주 건강하게 자라 있었다.
묵은 밭이라 풀매기도 번거롭고 해서 암스텔담에 갔을 때 고흐 미술관에서 구해온
해바라기 씨앗을 그곳에 뿌려 놓았었다.
그래서 요즘 해바라기가 가득 피어 있어서 풍경이 볼 만하게 되었다.
고추는 처음 장에서 모종을 갖다 심었는데 갑자기 냉해가 닥쳐 얼어 죽었다.
내가 사는 곳이 해발 한 8백 미터쯤 되는 곳이라서 그렇다.
그래서 다시 스무 포기 정도를 사다 심었다.
그런데 며칠 전 고추를 따면서 새삼 느낀 점이 있다.
내가 고추를 돌본 것은 단지 모종을 두 번 심어 주었고 풀 조금 매주었고,
지난 여름 몹시 가물었을 때 장에서 비닐 호스를 사다가 물 준 일밖에 없었다.
그리고 모른 체했는데 고추밭에 가보니까 고추가 그토록 많이 열려 있었다.
스무 포기에서 한 자루가 넘는 고추를 따냈다.
그래서 고추 보기가 참 부끄러웠다. 전혀 손질도 안해 주고 모른 체했는데,
단지 내가 해준 거라고는 가뭄에 물 좀 주었고 김 좀 매주었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것이다.
이것이 흙의 은혜다. 또 생명의 신비이다.
농경사회에선 이런 일들을 수시로 경험했기 때문에
자연의 질서와 도리를 삶의 원리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우리는 시장에 가서 편리하게 사다 먹으니까
생명의 신비와 자연의 순리로부터 자꾸만 멀어져 간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또한,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도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작은 것과 적은 것이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크고 많은 것만을 추구한다.
그러다 보니까 늘 갈증 상태에 놓여 있다.
소유물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는 이상으로 우리 자신을 소유해 버린다.
내가 무엇인가를 가졌을 때 그 물건에 의해 내가 가짐을 당하는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문화사 시간에 H. G. 웰즈가 쓴 세계문화사에 관한 책을 세계사 선생님한테 들었다.
그런데 친구집에 갔더니 그 책이 있었다.
그때부터 그걸 갖고 싶어서 몇 번을 친구에게 부탁했다. 그책을 나한테 팔으라고.
친구는 그 책을 읽지도 않으면서 팔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눈에 어른거려서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세계문화사라는 내용보다도
책을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것에 골몰한 것이다.
얼마 후에 헌책방에 가서 그걸 샀는데 한 절반 읽다가 말아 버렸다.
소유란 그런 것이다.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에 있지 않다.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에 있다.
홀가분한 마음, 여기에 행복의 척도가 있다.
남보다 적게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이라는 말을 거듭 새겨 두기 바란다.
내가 잘 아는 스님이 머무는 방에 가 보면 방석 하나 달랑 하나 있고
죽비 있고 한쪽 구석에 찻그릇 정도 뿐이다.
그런 걸 볼 때마다 얼마나 넉넉한지 모른다.
그 방을 거쳐서 나오기만 해도 내 안에서 향기로운 바람이 일어나는 것 같다.
맑은 가난이나 청빈이라는 말은 이제 거의 들어볼 수 없게 되었다.
맑은 가난은 인간의 고귀한 덕이다.
과잉소비와 포식 사회가 인간을 병들게 한다.
우리는 얼마나 소비를 많이 하는가. 사실 소비자라는 말은 인간을 모독하는 말이다.
소비자란 말은 쓰레기를 만드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것은 인간을 모독하는 말이다.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가 있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이것은 소극적인 생활 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무엇보다 자연의 도리를 삶의 원리로 삼아야 한다.
자연의 도리와 질서를 우리 삶의 질서로 삼아야 한다.
우리 자신이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알아야 한다.
나는 가끔 차를 타고 지나다가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 산을 허무는 걸 보면
내 팔과 몸이, 어느 한 부분이 달아나는 것처럼 아프다.
자연의 신음소리를 그대로 내가 듣는다.
몇 사람이 즐기기 위해서 자연을 그렇게 허물고 있다.
우리들 자신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인간은 생태계적인 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들 인간의 행위가 곧 자연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 행위는 결과로서 우리 곁으로 되돌아온다.
보라. 식수 문제, 공기 문제, 오염된 음식 문제,
이 모든 것이 인과관계이다.
우리가 뿌린 씨가 그 열매로서 우리에게 온 것이다.
그것이 우주의 메아리이다.
오늘의 문명은 자연이 낳은 이자만으로도 모자라서
자연이 축적해 놓은 자본까지 갉아먹고 있다.
더 많이 만들고 더 많이 소비하는 산업 구조가 문제이다.
자연은 한정되어 있는데 언제까지 더 많이 만들고 더 많이 소비할 것인가.
농경사회에서는 쓰레기가 없었다.
땅에서 나온 건 다시 땅으로 되돌아가는 비료의 기능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산업사회에 와서 화학제품과 공업제품이 땅과 지하수를 더럽히고 있다.
이것들은 땅에 들어가도 삭질 않는다.
우리가 보다 인간다운 삶을 이루려면 될 수 있는 한 생활용품을 적게 사용하면서
간소하고,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사람의 삶이다.
내 개인적인 희망이 있다면,
어떻게 하면 보다 단순하고 간소한 삶을 이룰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단순하고 간소한 삶을 통해서 내게 주어진 본질적인 사명을 누릴 수 있고,
안팎으로 자유로워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이들은 좋은 친구이다.
그러나 내가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려고 하는데 자꾸만 뭔가 갖다 주는 사람은
나에겐 달갑지 않은 친구이다.
내가 아무 것도 갖지 않았을 때 온 세상을 차지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가졌다고 할 때 크건 작건 그것의 노예가 된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소유를 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유해진다.
꽃이나 새는 자기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저마다 자기 특성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우주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비교는 시샘과 열들감을 낳는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삶에 충실할 때,
그런 자기 자신과 함께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다.
사람마다 자기 그릇이 있고 몫이 있다.
그 그릇에 그 몫을 채우는 것으로 자족해야 한다.
스스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내 그릇과 내 몫을 알아야 하는데 그걸 모르고
남의 몫을, 남의 그릇을 자꾸 넘겨다 보려고 한다.
소유를 제한하고 자제하는 것이 우리 정신을 보다 풍요롭게 한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 환경과 자연을 덜 훼손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거듭 말하지만 무엇보다도 단순한 삶이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을 거듭거듭 안으로 살펴봐야 한다.
내가 지금 순간순간 살고 있는 이 일이 인간의 삶인가,
지금 나답게 살고 있는가, 스스로를 점검을 해야 한다.
무엇이 되어야 하고 무엇을 이룰 것인가를 스스로 물으면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된다.
누가 내 인생을 만들어 주는가.
내가 내 인생을 만들어 갈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다.
저마다 자기 그림자를 거느리고 휘적휘적 지평선 위를 걸어가고 있지 않는가.
자기를 만들기 위해서.
단순한 삶이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근원적인 눈을 뜨게 한다.
단순한 삶을 이루려면 투철한 자기 억제와 자기 질서를 가져야 한다.
보지 않아도 좋을 것은 보지 말고,
듣지 않아도 좋을 것은 듣지 말고,
읽지 않아도 좋을 것은 읽지 말며,
먹지 않아도 좋을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가려 가면서
적게 보고, 적게 듣고, 적게 입고, 적게 먹어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 성숙해지고 승화될 수 있다.
보다 적은 것이 보다 귀한 것이고, 결과적으로도 넉넉한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런 생활 태도를 소극적인 생활 태도라고 잘못 알아선 안된다.
그것은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행복의 조건은 결코 크거나 많거나 거창한 데 있지 않다.
작은 일을 갖고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해 질 수 있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보면서도 행복해질 수 있고,
저녁노을을 보면서도 하루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우리가 너무 거창한 데서, 큰 데서, 야단스러운 데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그런 행복도 놓치고 만다.
행복의 조건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작은 일 속에 있다.
우리가 그걸 찾아내면 되는 것이다.
조촐한 삶과 드높은 영혼을 지니고 자기 자신답게 살 줄 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행복할 수 있다.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무한경쟁을 치르지 않고서도,
초일류가 되지 않고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
‘풍요로운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도 정신이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자신의 삶에 대한 투철한 각성 없이는 그 감옥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자신이 지금 깨어 있는지 잠들어 있는지 수시로 물어야 한다.
인도의 시인 까비르는 이렇게 노래한다.
‘물 속의 물고기가 목말라 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웃는다.’
물 속에 사는 물고기가 목말라 한다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 웃는다는 것이다.
‘물 속의 물고기가 목말라 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웃는다.
진리는 바로 그대 안에 있다.
그러나 그대 자신은 이것을 알지 못한 채
이 숲에서 저 숲으로 쉴 새없이 헤매고 있다.
여기,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진리를 보라.
그대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보라.
이도시로 조 산속으로.
그러나 그대 영혼을 찾지 못한다면
세상은 여전히 환상에 지나지 않으리.‘
사람의 본성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본래부터 맑고 향기롭다.
본래 청정한 우리 마음을 깨닫고,
저마다 지닌 귀하고 소중한 그 덕성의 씨앗을 한 송이 꽃으로 피워야 할 것이다.
까비르는 말한다.
그대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보라고. 이 도시로 저 산속으로.
그러나 그대 영혼을 찾지 못한다면 세상은 여전히 환상에 지나지 않으리라.
저마다 의미를 하나하나 채워 나가지 않으면
어던 화려한 인생이라 할지라도 마침내 빈 껍질로 남으리라.
법정 스님
자연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고 사람이 기댈 영원한 품이다.
또 자연은 잘못된 현대 문명의 유일한 해독제이다.
하늘과 구름, 별과 이슬과 바람, 흙과 강물, 햇살과 바다, 나무와 짐승과 새들,
길섶에 피어있는 하잘 것 없는 풀꽃이라도
그것은 우주적인 생명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건성으로 보지 말고 유심히 바라보라.
그러면 거기에서 자연이 지니고 있는,
생명이 지니고 있는 신비성과 아름다움을 캐낼 수가 있다.
모든 것이 다 필요한 존재이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 필요한 것이다.
어떤 생물이 됐든 필요하기 때문에 생겨났다.
그런데 그것이 귀찮다고 해서 농약으로, 강한 살충제로 죽여보라.
그 생물만 없어지는 게 아니고 그것이 연쇄반응을 일으켜서
우리에게 진짜 없어서는 안 될 이로운 것까지 모두 사라진다.
오늘 이 생태계의 이변과 환경 문제, 또 지구 온난화 문제,
이것이 다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가 전체적인 흐름과 조화를 모르고 어떤 부분적인 것에 갇혀서
그것만 지나치게 소비하고 낭비하고 혹사시키다 보니까
지구 자체가 인간들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저기 털어내고 재채기도 하느라고
지구는 지진도 일으켰다가 또 사방에 불도 일으키는 것이다.
지구 표면에 사는 인간들이 마치 물것처럼 하도 귀찮게 구니까 털어내느라고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지구가 무엇인가.
우리가 기대고 있는 생명의 바탕이다.
우리만 살고 지나갈 생명의 장소가 아니다.
영원히 존속되어야 할 생명의 터전이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우리가 너무도 지구를 함부로 대했기 때문에
그 보상으로써 지금과 같은 여러 재난과 이변이 오는 것이다.
세상을 돌아보면 인간인 내 자신이 우울하고 착잡해진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짐승보다 나을 게 어디 있는가.
삶의 가치를 어디다 두고 살아야 할 것인가.
일찍이 세상을 떠난 우리의 조상들이 오늘의 우리를 보고
주저없이 당신네 후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런 물음을 스스로 던지게 된다.
흔히 우리가 짐승만도 못하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짐승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일이다.
짐승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이 지금 이렇게 타락하고 있지 않은가.
새삼스레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일직이 흙을 가까이 하고 살던 농경사회에서는 감히 상상 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미국의 철학자 마르쿠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풍요로운 감옥에 비유하고 있다.
감옥 속에 냉장고와 세탁기가 갖춰져 있고 텔레비전 수상기와 오디오가 놓여 있다.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풍요로운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어떤 것이 진정한 인간이고,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근원적인 물음 앞에 마주 서야 한다.
그런 물음과 대면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없다.
항상 자신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고,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무엇보다도 사람답게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첫째, 자기 자신에 대한 각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각성, 자기 존재에 대한 각성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 각성을 통해서 비로소 마음이 열린다.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이미 열려져 있는 세상을 내가 받아 들일 수 없다.
다시 말해 세상과 내가 하나를 이룰 수 없다.
세상과 내가 하나를 이루지 못하면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라는 파도 위에서 겉도는 것에 불과하다.
마음이 열려야만 세상과 내가 하나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마음이 열려야만 평온과 안정을 이룰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나는 누구인가.
자신의 속얼굴이 보일 때까지 묻고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 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물음 속에 들어 있다.
그러나 묻지 않고는 그 해답을 이끌어낼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거듭거듭 물어야 한다.
모든 것은 세월의 풍상에 씻겨 시들고 허물어져 간다.
거죽은 늘 변하기 마련이다.
불교 용어로는 ‘무상하다’는 말이 있다.
모든 것은 무상하고 덧없다.
항상하지 않고 영원하지 않다.
늘 변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다.
만일 이 세상이 잔뜩 굳어 있어서 변함이 없다면 숨이 막힐 것이다.
변하기 때문에 환자가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고,
가난한 사람이 부자로 살 수도 있는 것이고,
오만한 사람이 겸손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어두운 면이 밝아질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변해 가느냐에 달려 있다.
자신의 중심을 들여다 봐야 한다. 중심은 늘 새롭다.
거죽에 살지 않고 중심에 사는 사람은
어떤 세월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허물어지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이 원초적인 물음을 통해서 늘 중심에 머물러야 한다.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각성을 추구해야 한다.
사람이 또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나눠 가질 줄 알아야 한다.
이웃은 나와 무관한, 전혀 인연이 없는 타인이 아니다.
그들은 내 분신이다. 또 하나의 몸이다.
왜냐하면 한 뿌리에서, 생명의 커다란 한 뿌리에서 나누어진 가지가
바로 이웃이기 때문이다.
내 자신은 그 한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내 이웃이란 또다른 가지이다.
나눠가짐으로써 내 인간의 영역이 그만큼 확산된다.
열린 눈으로 사물을 대해야 한다.
모든 일은 내가 공들여 뿌려서 거두는 것이지 거저 되는 일은 없다.
이것은 우리들이 일상적인 일을 통해서 수시로 경험하는 일이다.
이 세상에 저절로 되는 일은 없다.
내가 뿌려서 거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주의 질서이다.
이런 우주의 질서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며칠 전에 겪은 일이다.
나는 다른 일도 그렇지만 농사일에 서툴다.
채마밭이 있어서 이것저것 심었는데 밖에 나들이갔다 돌아왔더니
봄에 뿌린 씨앗들이 다들 시원치가 않고 고추와 케일과 해바라기,
이 세가지만 아주 건강하게 자라 있었다.
묵은 밭이라 풀매기도 번거롭고 해서 암스텔담에 갔을 때 고흐 미술관에서 구해온
해바라기 씨앗을 그곳에 뿌려 놓았었다.
그래서 요즘 해바라기가 가득 피어 있어서 풍경이 볼 만하게 되었다.
고추는 처음 장에서 모종을 갖다 심었는데 갑자기 냉해가 닥쳐 얼어 죽었다.
내가 사는 곳이 해발 한 8백 미터쯤 되는 곳이라서 그렇다.
그래서 다시 스무 포기 정도를 사다 심었다.
그런데 며칠 전 고추를 따면서 새삼 느낀 점이 있다.
내가 고추를 돌본 것은 단지 모종을 두 번 심어 주었고 풀 조금 매주었고,
지난 여름 몹시 가물었을 때 장에서 비닐 호스를 사다가 물 준 일밖에 없었다.
그리고 모른 체했는데 고추밭에 가보니까 고추가 그토록 많이 열려 있었다.
스무 포기에서 한 자루가 넘는 고추를 따냈다.
그래서 고추 보기가 참 부끄러웠다. 전혀 손질도 안해 주고 모른 체했는데,
단지 내가 해준 거라고는 가뭄에 물 좀 주었고 김 좀 매주었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것이다.
이것이 흙의 은혜다. 또 생명의 신비이다.
농경사회에선 이런 일들을 수시로 경험했기 때문에
자연의 질서와 도리를 삶의 원리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우리는 시장에 가서 편리하게 사다 먹으니까
생명의 신비와 자연의 순리로부터 자꾸만 멀어져 간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또한,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도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작은 것과 적은 것이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크고 많은 것만을 추구한다.
그러다 보니까 늘 갈증 상태에 놓여 있다.
소유물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는 이상으로 우리 자신을 소유해 버린다.
내가 무엇인가를 가졌을 때 그 물건에 의해 내가 가짐을 당하는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문화사 시간에 H. G. 웰즈가 쓴 세계문화사에 관한 책을 세계사 선생님한테 들었다.
그런데 친구집에 갔더니 그 책이 있었다.
그때부터 그걸 갖고 싶어서 몇 번을 친구에게 부탁했다. 그책을 나한테 팔으라고.
친구는 그 책을 읽지도 않으면서 팔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눈에 어른거려서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세계문화사라는 내용보다도
책을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것에 골몰한 것이다.
얼마 후에 헌책방에 가서 그걸 샀는데 한 절반 읽다가 말아 버렸다.
소유란 그런 것이다.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에 있지 않다.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에 있다.
홀가분한 마음, 여기에 행복의 척도가 있다.
남보다 적게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이라는 말을 거듭 새겨 두기 바란다.
내가 잘 아는 스님이 머무는 방에 가 보면 방석 하나 달랑 하나 있고
죽비 있고 한쪽 구석에 찻그릇 정도 뿐이다.
그런 걸 볼 때마다 얼마나 넉넉한지 모른다.
그 방을 거쳐서 나오기만 해도 내 안에서 향기로운 바람이 일어나는 것 같다.
맑은 가난이나 청빈이라는 말은 이제 거의 들어볼 수 없게 되었다.
맑은 가난은 인간의 고귀한 덕이다.
과잉소비와 포식 사회가 인간을 병들게 한다.
우리는 얼마나 소비를 많이 하는가. 사실 소비자라는 말은 인간을 모독하는 말이다.
소비자란 말은 쓰레기를 만드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것은 인간을 모독하는 말이다.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가 있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이것은 소극적인 생활 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무엇보다 자연의 도리를 삶의 원리로 삼아야 한다.
자연의 도리와 질서를 우리 삶의 질서로 삼아야 한다.
우리 자신이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알아야 한다.
나는 가끔 차를 타고 지나다가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 산을 허무는 걸 보면
내 팔과 몸이, 어느 한 부분이 달아나는 것처럼 아프다.
자연의 신음소리를 그대로 내가 듣는다.
몇 사람이 즐기기 위해서 자연을 그렇게 허물고 있다.
우리들 자신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인간은 생태계적인 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들 인간의 행위가 곧 자연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 행위는 결과로서 우리 곁으로 되돌아온다.
보라. 식수 문제, 공기 문제, 오염된 음식 문제,
이 모든 것이 인과관계이다.
우리가 뿌린 씨가 그 열매로서 우리에게 온 것이다.
그것이 우주의 메아리이다.
오늘의 문명은 자연이 낳은 이자만으로도 모자라서
자연이 축적해 놓은 자본까지 갉아먹고 있다.
더 많이 만들고 더 많이 소비하는 산업 구조가 문제이다.
자연은 한정되어 있는데 언제까지 더 많이 만들고 더 많이 소비할 것인가.
농경사회에서는 쓰레기가 없었다.
땅에서 나온 건 다시 땅으로 되돌아가는 비료의 기능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산업사회에 와서 화학제품과 공업제품이 땅과 지하수를 더럽히고 있다.
이것들은 땅에 들어가도 삭질 않는다.
우리가 보다 인간다운 삶을 이루려면 될 수 있는 한 생활용품을 적게 사용하면서
간소하고,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사람의 삶이다.
내 개인적인 희망이 있다면,
어떻게 하면 보다 단순하고 간소한 삶을 이룰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단순하고 간소한 삶을 통해서 내게 주어진 본질적인 사명을 누릴 수 있고,
안팎으로 자유로워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이들은 좋은 친구이다.
그러나 내가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려고 하는데 자꾸만 뭔가 갖다 주는 사람은
나에겐 달갑지 않은 친구이다.
내가 아무 것도 갖지 않았을 때 온 세상을 차지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가졌다고 할 때 크건 작건 그것의 노예가 된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소유를 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유해진다.
꽃이나 새는 자기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저마다 자기 특성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우주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비교는 시샘과 열들감을 낳는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삶에 충실할 때,
그런 자기 자신과 함께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다.
사람마다 자기 그릇이 있고 몫이 있다.
그 그릇에 그 몫을 채우는 것으로 자족해야 한다.
스스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내 그릇과 내 몫을 알아야 하는데 그걸 모르고
남의 몫을, 남의 그릇을 자꾸 넘겨다 보려고 한다.
소유를 제한하고 자제하는 것이 우리 정신을 보다 풍요롭게 한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 환경과 자연을 덜 훼손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거듭 말하지만 무엇보다도 단순한 삶이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을 거듭거듭 안으로 살펴봐야 한다.
내가 지금 순간순간 살고 있는 이 일이 인간의 삶인가,
지금 나답게 살고 있는가, 스스로를 점검을 해야 한다.
무엇이 되어야 하고 무엇을 이룰 것인가를 스스로 물으면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된다.
누가 내 인생을 만들어 주는가.
내가 내 인생을 만들어 갈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다.
저마다 자기 그림자를 거느리고 휘적휘적 지평선 위를 걸어가고 있지 않는가.
자기를 만들기 위해서.
단순한 삶이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근원적인 눈을 뜨게 한다.
단순한 삶을 이루려면 투철한 자기 억제와 자기 질서를 가져야 한다.
보지 않아도 좋을 것은 보지 말고,
듣지 않아도 좋을 것은 듣지 말고,
읽지 않아도 좋을 것은 읽지 말며,
먹지 않아도 좋을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가려 가면서
적게 보고, 적게 듣고, 적게 입고, 적게 먹어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 성숙해지고 승화될 수 있다.
보다 적은 것이 보다 귀한 것이고, 결과적으로도 넉넉한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런 생활 태도를 소극적인 생활 태도라고 잘못 알아선 안된다.
그것은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행복의 조건은 결코 크거나 많거나 거창한 데 있지 않다.
작은 일을 갖고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해 질 수 있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보면서도 행복해질 수 있고,
저녁노을을 보면서도 하루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우리가 너무 거창한 데서, 큰 데서, 야단스러운 데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그런 행복도 놓치고 만다.
행복의 조건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작은 일 속에 있다.
우리가 그걸 찾아내면 되는 것이다.
조촐한 삶과 드높은 영혼을 지니고 자기 자신답게 살 줄 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행복할 수 있다.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무한경쟁을 치르지 않고서도,
초일류가 되지 않고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
‘풍요로운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도 정신이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자신의 삶에 대한 투철한 각성 없이는 그 감옥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자신이 지금 깨어 있는지 잠들어 있는지 수시로 물어야 한다.
인도의 시인 까비르는 이렇게 노래한다.
‘물 속의 물고기가 목말라 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웃는다.’
물 속에 사는 물고기가 목말라 한다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 웃는다는 것이다.
‘물 속의 물고기가 목말라 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웃는다.
진리는 바로 그대 안에 있다.
그러나 그대 자신은 이것을 알지 못한 채
이 숲에서 저 숲으로 쉴 새없이 헤매고 있다.
여기,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진리를 보라.
그대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보라.
이도시로 조 산속으로.
그러나 그대 영혼을 찾지 못한다면
세상은 여전히 환상에 지나지 않으리.‘
사람의 본성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본래부터 맑고 향기롭다.
본래 청정한 우리 마음을 깨닫고,
저마다 지닌 귀하고 소중한 그 덕성의 씨앗을 한 송이 꽃으로 피워야 할 것이다.
까비르는 말한다.
그대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보라고. 이 도시로 저 산속으로.
그러나 그대 영혼을 찾지 못한다면 세상은 여전히 환상에 지나지 않으리라.
저마다 의미를 하나하나 채워 나가지 않으면
어던 화려한 인생이라 할지라도 마침내 빈 껍질로 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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