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스님─영명사 지장산림 대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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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법명사 댓글 0건 조회 980회 작성일 14-06-04 15:05본문
영명사 지장산림 대법회
종범스님
한 번의 지극정성 칭명
생사 끊고 해탈할 수 있어
지장보살의 대원 첫째는 중생들을 모두 제도하고 난후
깨딜음을 이루겠다는 것이며
둘째는 지옥이 텅 비지 않으면 결코 성불하지 않겟다는 것.
‘살림살이’란 내가 가족과 이웃을 살리는 일이니
공덕 짓는 것과 같은 이치.
내가 행복하려면 타인 도움 있어야 가능한 만큼 선행 베풀어야.
불난 집에서 살 길은 그 집서 나오는 것.
고통서 벗어나는 길 또한 해탈 뿐.
한국불교는 대승불교이기 때문에
석가모니부처님을 비롯해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약사여래불 모두를 신앙합니다.
사찰 순례를 하다 보면 대웅전, 관음전, 비로전,
약사전 등을 볼 수 있는데
지장전과 명부전은 지장보살님을 모신 전각입니다.
지장보살님은 큰 원을 세우신 분이기에
대원본존지장보살이라고도 합니다.
지장보살님의 대원
첫째는
중생들을 모두 제도하고 난 후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지옥이 텅 비지 않으면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장보살님은
“자신이 지옥에 들어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들어가겠는가?”라며
스스로 지옥에 들어가 지옥중생들을
모두 제도하겠다는 원력을 세웠습니다.
지하에선 해 보기 어려워
「지장본원경」을 보면
지옥에 대한 이야기가 참으로 많습니다.
지옥은 고통 그 자체입니다.
우리 중생도 지옥 속에 사는 것과 별반 다름없습니다.
찰나의 생각생각 속에 고통이 자리하고 있으니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장보살님은 중생들이 고통을 여의고
복락을 얻을 때까지 인도하시겠다는 분입니다.
또한 지장보살님은 중생을 하늘에 태어나게 하겠다는
원력을 세우신 분입니다.
지옥은 고통만 있고 즐거움이 없는 세상입니다.
우리 인간은 지옥으로도 가고 천상으로도 갈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바로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시지만
우리는 부처님을 잘 못 만납니다.
중생심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하 깊숙한 곳에서는 문을 열어도 해를 볼 수 없지만
지상에서는 문만 열면 바로 해를 볼 수 있습니다.
삼악도에 떨어지면 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지장보살님이 지상으로 중생을 이끌어
해를 보게 해 복락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겁니다.
복덕 차버리는 수 많아
그러나 우리의 원력 없이는 지장보살님 가피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지장보살님의 가피를 얻어
천상으로 나아가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가 하면
그 첫 번째 방법이 칭명이고
두 번째는 예배이며
세 번째는 기도입니다.
칭명하며 예배하고 공양 올리는 그 인연 속에
무한한 인연이 숨겨져 있기에 복락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장보살님 명호 부르는 데 한량없는 복덕이 있다고
들으셨겠지만 믿지 못하는 분 많습니다.
더욱이 한 번만 불러도 복덕 있다는 말은
더욱 믿기 힘드실 것입니다.
중생들은 작은 것이 큰 것인 줄 모릅니다.
부산에서 서울로 향하는 기차 안에 파리 몇 마리가 들어와
날아다닌 경우를 많이 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부산 파리가 기차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평생 서울 구경 못할 겁니다.
그런데 일단 기차 안에만 들어오면 네 시간 이내
서울 구경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보통 일입니까?
지장보살 만나는 순간 우리도 기차 안에
들어온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장보살 믿고 칭명하며 기도 하는 순간
복덕은 물론 해탈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누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인연을 맺고도 몰라 자신의 복덕을
차버리는 수가 많습니다.
기차 안 파리도 서울 가는 줄 알면 가만히 있겠지만
그것을 모르니 이 사람 저사람 얼굴에 붙으려 하다가
유명을 달리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애석한 일입니까?
지장보살님은 우리 중생을 해탈로 인도합니다.
중생은 중생이 노니는 텃밭이 있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벗어나 살기 어렵고,
호랑이가 산을 벗어나 살기 어렵듯이
사람도 노니는 터가 따로 있는 법입니다.
특별한 인연 없이는 자기 텃밭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인연알면‘살림살이' 잘해
복을 받아도 그 복이 영원히 있는 게 아니라
인연이 다하면 사라집니다.
이게 바로 중생세계 복락의 한계입니다.
인간 복락이 지옥 복락 보다 좋고,
천상복락이 인간 복락 보다 좋다고 하지만,
천상복락도 영원무궁한 것이 아니라
복이 다하면 떨어집니다.
복진타락이라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지장보살님은 육도윤회의 사슬을 끊는
해탈까지 인도하시는 겁니다.
경봉 노스님 설법집에 보면
“망부석에게 물어보라”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짐을 짊어지고 길을 가던 비단 장수가 망부석 아래서 쉬다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짐이 없어졌습니다.
원님에게 사실을 고하자 원님은
“짐 가져가는 것을 누가 보았느냐?”물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났으니 누가 가져갔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비단 장수는
“혹 망부석이 보았으면 보았지
저는 보지 못했다”고 답했습니다.
원님은 그 자리서 망부석을 잡아와
“누가 가져갔는지 말 하라”며 매질을 했습니다.
망부석 매질 소식이 온 동네에 퍼지자
사람들이 몰려와 구경했습니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지자 원님은 웃고 떠든 모든 사람을
감옥에 가두라 명령한 후
“비단 한 필을 가져오면 풀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제각각 갖고 있던 비단을 한 필씩을 가져오자
원님은 비단 주인에게 자신의 것이 있는지를
확인 한 후 도둑을 잡았습니다.
이것이 인연입니다.
망부석을 매질 할 때 누가 도둑을 잡을 주 알았겠습니까?
이것이 불교의 인연법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 오게 된 것도 인연에 의해서입니다.
여러분도 이 자리에 오실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신 분은 운전수가 이곳까지
데려다 주었기에 오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말입니다.
복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의 행복은 남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농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볍씨를 개발해 전해주었기에 지금 이 순간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인으로부터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도 타인에게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이게 불교의 인연법입니다.
영명사와 같은 좋은 지장도량을 만나고
이곳 지장보살님을 만나는 것도 큰 인연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도 사건이며,
부처님 법 만난 것 역시 크나 큰 인연입니다.
나아가 불교를 만나 기도를 잘 하고
부처님도 알아 즐거움을 얻어
윤회의 얽매임에서 벗어나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살림살이라는 말 많이 하시지요?
살림살이라 하니 내 재산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살림살이에서 ‘살림’이란 ‘살리다’에서 나온 말이고
‘살이’란 ‘살다’에서 나온 말입니다.
즉 나만 사는 게 아니라 남도 살리는 게‘살림살이’입니다.
즉 내가 남편과 친척, 이웃도 살려야 하는 것이니,
공덕과 그 이치가 똑 같습니다.
내가 공덕을 지어야 행복할 수 있는데
요즘엔 살림살이 안 하려 하니 문제입니다.
미륵부처님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미륵 부처님 중에는 날씬한 부처님도 있고
통통한 부처님도 있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미륵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투시는 것은
순전히 석공의 솜씨 때문입니다.
이것도 인연법입니다.
선행-감사할 줄 알아야
인연을 잘 지으면 선지식도 만나고
좋은 사람 만나 복 받아 천상에 태어납니다.
그리고 복 받은 것에 감사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법화경을 보면
‘삼계화택’ 이야기가 있습니다.
불난 집에서 살아남는 길은 그 집에서 나오는 길 뿐입니다.
꿈속에서 시달리는 사람은 꿈을 깨는 길 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해탈하는 길 뿐입니다.
사람 몸 받았을 때
부처님 법 만난 것은 일대사 큰 인연입니다.
이 자리서 지장보살님 만나 정성을 다한 기도를 한다면
분명 고통을 여의고 복락을 누리는 동시에
육도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리=채한기 기자
사진=김영각 대구지사장
-법보신문에서-
종범스님
한 번의 지극정성 칭명
생사 끊고 해탈할 수 있어
지장보살의 대원 첫째는 중생들을 모두 제도하고 난후
깨딜음을 이루겠다는 것이며
둘째는 지옥이 텅 비지 않으면 결코 성불하지 않겟다는 것.
‘살림살이’란 내가 가족과 이웃을 살리는 일이니
공덕 짓는 것과 같은 이치.
내가 행복하려면 타인 도움 있어야 가능한 만큼 선행 베풀어야.
불난 집에서 살 길은 그 집서 나오는 것.
고통서 벗어나는 길 또한 해탈 뿐.
한국불교는 대승불교이기 때문에
석가모니부처님을 비롯해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약사여래불 모두를 신앙합니다.
사찰 순례를 하다 보면 대웅전, 관음전, 비로전,
약사전 등을 볼 수 있는데
지장전과 명부전은 지장보살님을 모신 전각입니다.
지장보살님은 큰 원을 세우신 분이기에
대원본존지장보살이라고도 합니다.
지장보살님의 대원
첫째는
중생들을 모두 제도하고 난 후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지옥이 텅 비지 않으면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장보살님은
“자신이 지옥에 들어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들어가겠는가?”라며
스스로 지옥에 들어가 지옥중생들을
모두 제도하겠다는 원력을 세웠습니다.
지하에선 해 보기 어려워
「지장본원경」을 보면
지옥에 대한 이야기가 참으로 많습니다.
지옥은 고통 그 자체입니다.
우리 중생도 지옥 속에 사는 것과 별반 다름없습니다.
찰나의 생각생각 속에 고통이 자리하고 있으니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장보살님은 중생들이 고통을 여의고
복락을 얻을 때까지 인도하시겠다는 분입니다.
또한 지장보살님은 중생을 하늘에 태어나게 하겠다는
원력을 세우신 분입니다.
지옥은 고통만 있고 즐거움이 없는 세상입니다.
우리 인간은 지옥으로도 가고 천상으로도 갈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바로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시지만
우리는 부처님을 잘 못 만납니다.
중생심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하 깊숙한 곳에서는 문을 열어도 해를 볼 수 없지만
지상에서는 문만 열면 바로 해를 볼 수 있습니다.
삼악도에 떨어지면 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지장보살님이 지상으로 중생을 이끌어
해를 보게 해 복락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겁니다.
복덕 차버리는 수 많아
그러나 우리의 원력 없이는 지장보살님 가피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지장보살님의 가피를 얻어
천상으로 나아가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가 하면
그 첫 번째 방법이 칭명이고
두 번째는 예배이며
세 번째는 기도입니다.
칭명하며 예배하고 공양 올리는 그 인연 속에
무한한 인연이 숨겨져 있기에 복락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장보살님 명호 부르는 데 한량없는 복덕이 있다고
들으셨겠지만 믿지 못하는 분 많습니다.
더욱이 한 번만 불러도 복덕 있다는 말은
더욱 믿기 힘드실 것입니다.
중생들은 작은 것이 큰 것인 줄 모릅니다.
부산에서 서울로 향하는 기차 안에 파리 몇 마리가 들어와
날아다닌 경우를 많이 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부산 파리가 기차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평생 서울 구경 못할 겁니다.
그런데 일단 기차 안에만 들어오면 네 시간 이내
서울 구경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보통 일입니까?
지장보살 만나는 순간 우리도 기차 안에
들어온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장보살 믿고 칭명하며 기도 하는 순간
복덕은 물론 해탈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누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인연을 맺고도 몰라 자신의 복덕을
차버리는 수가 많습니다.
기차 안 파리도 서울 가는 줄 알면 가만히 있겠지만
그것을 모르니 이 사람 저사람 얼굴에 붙으려 하다가
유명을 달리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애석한 일입니까?
지장보살님은 우리 중생을 해탈로 인도합니다.
중생은 중생이 노니는 텃밭이 있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벗어나 살기 어렵고,
호랑이가 산을 벗어나 살기 어렵듯이
사람도 노니는 터가 따로 있는 법입니다.
특별한 인연 없이는 자기 텃밭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인연알면‘살림살이' 잘해
복을 받아도 그 복이 영원히 있는 게 아니라
인연이 다하면 사라집니다.
이게 바로 중생세계 복락의 한계입니다.
인간 복락이 지옥 복락 보다 좋고,
천상복락이 인간 복락 보다 좋다고 하지만,
천상복락도 영원무궁한 것이 아니라
복이 다하면 떨어집니다.
복진타락이라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지장보살님은 육도윤회의 사슬을 끊는
해탈까지 인도하시는 겁니다.
경봉 노스님 설법집에 보면
“망부석에게 물어보라”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짐을 짊어지고 길을 가던 비단 장수가 망부석 아래서 쉬다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짐이 없어졌습니다.
원님에게 사실을 고하자 원님은
“짐 가져가는 것을 누가 보았느냐?”물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났으니 누가 가져갔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비단 장수는
“혹 망부석이 보았으면 보았지
저는 보지 못했다”고 답했습니다.
원님은 그 자리서 망부석을 잡아와
“누가 가져갔는지 말 하라”며 매질을 했습니다.
망부석 매질 소식이 온 동네에 퍼지자
사람들이 몰려와 구경했습니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지자 원님은 웃고 떠든 모든 사람을
감옥에 가두라 명령한 후
“비단 한 필을 가져오면 풀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제각각 갖고 있던 비단을 한 필씩을 가져오자
원님은 비단 주인에게 자신의 것이 있는지를
확인 한 후 도둑을 잡았습니다.
이것이 인연입니다.
망부석을 매질 할 때 누가 도둑을 잡을 주 알았겠습니까?
이것이 불교의 인연법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 오게 된 것도 인연에 의해서입니다.
여러분도 이 자리에 오실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신 분은 운전수가 이곳까지
데려다 주었기에 오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말입니다.
복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의 행복은 남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농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볍씨를 개발해 전해주었기에 지금 이 순간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인으로부터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도 타인에게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이게 불교의 인연법입니다.
영명사와 같은 좋은 지장도량을 만나고
이곳 지장보살님을 만나는 것도 큰 인연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도 사건이며,
부처님 법 만난 것 역시 크나 큰 인연입니다.
나아가 불교를 만나 기도를 잘 하고
부처님도 알아 즐거움을 얻어
윤회의 얽매임에서 벗어나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살림살이라는 말 많이 하시지요?
살림살이라 하니 내 재산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살림살이에서 ‘살림’이란 ‘살리다’에서 나온 말이고
‘살이’란 ‘살다’에서 나온 말입니다.
즉 나만 사는 게 아니라 남도 살리는 게‘살림살이’입니다.
즉 내가 남편과 친척, 이웃도 살려야 하는 것이니,
공덕과 그 이치가 똑 같습니다.
내가 공덕을 지어야 행복할 수 있는데
요즘엔 살림살이 안 하려 하니 문제입니다.
미륵부처님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미륵 부처님 중에는 날씬한 부처님도 있고
통통한 부처님도 있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미륵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투시는 것은
순전히 석공의 솜씨 때문입니다.
이것도 인연법입니다.
선행-감사할 줄 알아야
인연을 잘 지으면 선지식도 만나고
좋은 사람 만나 복 받아 천상에 태어납니다.
그리고 복 받은 것에 감사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법화경을 보면
‘삼계화택’ 이야기가 있습니다.
불난 집에서 살아남는 길은 그 집에서 나오는 길 뿐입니다.
꿈속에서 시달리는 사람은 꿈을 깨는 길 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해탈하는 길 뿐입니다.
사람 몸 받았을 때
부처님 법 만난 것은 일대사 큰 인연입니다.
이 자리서 지장보살님 만나 정성을 다한 기도를 한다면
분명 고통을 여의고 복락을 누리는 동시에
육도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리=채한기 기자
사진=김영각 대구지사장
-법보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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