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스님─행복해 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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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법명사 댓글 0건 조회 962회 작성일 14-06-04 15:05본문
◈ 행복해 지는 길
종범스님 (전 조계종 포교원장)
옛날에 어떤 젊은 스님이 도인스님에게 묻기를 "날씨가 이렇게 더운데 어디로 가야 더위를 피 할 수 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도인스님이 "화탕놋탕(가마솥)에 들어가서 더위를 피하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음속에 더위가 무서워서 자꾸 도망가려 하면 어느 곳으로 가도 피할 길이 없고 마음속에 더위를 생각하지 아니하면 가마솥 끓는물 속에 들어가도 덥지 않다는 말입니 다.
누구나 결국 행복을 추구하게 되는데 문제는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 자기 마음을 통해서 행복 을 느끼는가 아니면 현실적인 환경을 개선해서 행복을 느끼는가의 방법차이 입니다.
자기 마음을 통해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은 요즘 학자들 용어를 빌면 신비주의 입니다. 또한 더 우면 선풍기도 돌리고 에어콘도 틀고 부채도 부쳐서 환경을 조금씩 개선해서 행복을 하나하나 이 루어가는 것이 합리주의 입니다. 이것이 현실만을 의존해서 마음은 황폐해지고 유약해져 가는 경 우도 있고 마음만을 강조해서 현실을 전혀 모른척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중국고사에 800년대 당나라 중기때, 백장선사라고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백장선사가 백장산 에서 설법을 하는데, 어떤 꼬부랑 노승이 항상와서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장선사가 궁금히 여겨 "어디계신 노스님이시기에 매일같이 와서 법문을 듣습니까"했더니 그 노승이 말하기를 "나 도 과거 부처님시대에 이 산에서 당신처럼 법을 설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와서 도를 통한 사 람은 인과를 잘못지어도 그것이 허물이 되는가 아닌가를 물었습니다. 그래서 엉겁결에 인과에 떨 어지지 않는다고 대답을 해버렸습니다(불락인과不落因果). 그후 그 대답을 해놓고도 잘못된것인지 아닌지 미심쩍었는데 죽어서 여우가 되어 그 몸을 벗지 못하고 오늘까지 그 문제의 해답을 얻으려고 매 일같이 설법을 듣는 것입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백장선사는 "그럼 다시 나에게 그 물음을 물으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여우가 된 노승이 물었더니, 백장선사는 불매인과(不昧因果)라 즉 도를 통한 사람은 인과에 어둡지 않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즉 되는 일인지 안되는 일인지를 환히 알아서 전혀 주저함이 없이 어리석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 말을 들은 여우는 바로 해탈을 했다고 합니다.
그럼 만약에 석가모니 부처님께 와서 같은 질문을 했을 때 부처님이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대답을 하셨다면 부처님조차 여우몸을 받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인과에 떨어지고 안떨어지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의심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원리를 환히 아는 사람은 인과에 떨어진다고 해도 문제가 안되는 것이고 내가 말을 잘못했나하고 자꾸 의심을 하게 되면 그 의심을 하는 것 자체가 여우입니다. 말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알고있는 사람이면 문제될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마음속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입니다.
경에 보면 공부 안하고 게으른 사람은 죽여도 죄가 안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말은 불교가 자 비방생으로 목숨만 연장해서 살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세계를 복되게 광명으로 깨우치는 것이 진짜 방생이라는 것입니다. 즉 중생을 다 극락세계로 인도하고 해탈, 복덕, 평화의 세계로 인도할 때, 중생은 자유로워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앞으로 말한 행복해지는 길인데 그 방법은 위에서 말한 두가지 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이 유약해질수록 환경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또 지진이 나던지 불이 나던지 상관없이 마음속에서만 만족을 얻으면 되는가 하는 문 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마음의 문제는 마음으로 해결하고 환경으로 해결할 문제는 환경으로 해결 해서 심경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불입니다. 이런 마음과 환경을 하나로 성숙시켜 나가는 것이 바로 대승불교이고 그것이 바로 도입니다.
쉬운 예를들어 주부가 음식을 만들면 그것은 가족의 건강을 도모하는 동시에 자기의 기쁨도 됩 니다. 또한 절에서 스님들이 목수일을 해서 법당을 지으면 그것이 법당을 짓는 것과 동시에 자기 수양이 됩니다. 그렇게 지은 것이 석굴암과 같은 위대한 작품이 되기도 했습니다. 스님들이 매일 글씨를 쓰는데 자기 수양을 위해서 쓸때와 작품을 만들려고 쓰는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오늘날 우리는 노동을 하는데 전혀 수양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현대인은 자기수양과 전문노동 이 일치되어야 이상적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 속에서 수양을 하는 멋을 찾아내야 합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자기도 좋고 남도 좋은 자리이타(自利利他)가 됩니다.
요즘 우리사회는 다른사람에게 이로우면 내가 손해이고 내가 이로우면 다른사람이 손해인 것이 갈등입니다. 심지어 아이를 많이 낳으면 내 인생 손해라고 아이 안낳기 운동이 일고 있습니다. 아이 키우는 것이 내 행복이고 내 행복이 아이 키우는 것이라고 동시에 생각되어야 합니다.
나도 기쁘고 이로우며 다른 사람도 기쁘게 되는 것이 진짜 행복해 지는 길입니다.
종범스님 (전 조계종 포교원장)
옛날에 어떤 젊은 스님이 도인스님에게 묻기를 "날씨가 이렇게 더운데 어디로 가야 더위를 피 할 수 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도인스님이 "화탕놋탕(가마솥)에 들어가서 더위를 피하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음속에 더위가 무서워서 자꾸 도망가려 하면 어느 곳으로 가도 피할 길이 없고 마음속에 더위를 생각하지 아니하면 가마솥 끓는물 속에 들어가도 덥지 않다는 말입니 다.
누구나 결국 행복을 추구하게 되는데 문제는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 자기 마음을 통해서 행복 을 느끼는가 아니면 현실적인 환경을 개선해서 행복을 느끼는가의 방법차이 입니다.
자기 마음을 통해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은 요즘 학자들 용어를 빌면 신비주의 입니다. 또한 더 우면 선풍기도 돌리고 에어콘도 틀고 부채도 부쳐서 환경을 조금씩 개선해서 행복을 하나하나 이 루어가는 것이 합리주의 입니다. 이것이 현실만을 의존해서 마음은 황폐해지고 유약해져 가는 경 우도 있고 마음만을 강조해서 현실을 전혀 모른척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중국고사에 800년대 당나라 중기때, 백장선사라고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백장선사가 백장산 에서 설법을 하는데, 어떤 꼬부랑 노승이 항상와서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장선사가 궁금히 여겨 "어디계신 노스님이시기에 매일같이 와서 법문을 듣습니까"했더니 그 노승이 말하기를 "나 도 과거 부처님시대에 이 산에서 당신처럼 법을 설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와서 도를 통한 사 람은 인과를 잘못지어도 그것이 허물이 되는가 아닌가를 물었습니다. 그래서 엉겁결에 인과에 떨 어지지 않는다고 대답을 해버렸습니다(불락인과不落因果). 그후 그 대답을 해놓고도 잘못된것인지 아닌지 미심쩍었는데 죽어서 여우가 되어 그 몸을 벗지 못하고 오늘까지 그 문제의 해답을 얻으려고 매 일같이 설법을 듣는 것입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백장선사는 "그럼 다시 나에게 그 물음을 물으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여우가 된 노승이 물었더니, 백장선사는 불매인과(不昧因果)라 즉 도를 통한 사람은 인과에 어둡지 않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즉 되는 일인지 안되는 일인지를 환히 알아서 전혀 주저함이 없이 어리석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 말을 들은 여우는 바로 해탈을 했다고 합니다.
그럼 만약에 석가모니 부처님께 와서 같은 질문을 했을 때 부처님이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대답을 하셨다면 부처님조차 여우몸을 받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인과에 떨어지고 안떨어지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의심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원리를 환히 아는 사람은 인과에 떨어진다고 해도 문제가 안되는 것이고 내가 말을 잘못했나하고 자꾸 의심을 하게 되면 그 의심을 하는 것 자체가 여우입니다. 말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알고있는 사람이면 문제될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마음속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입니다.
경에 보면 공부 안하고 게으른 사람은 죽여도 죄가 안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말은 불교가 자 비방생으로 목숨만 연장해서 살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세계를 복되게 광명으로 깨우치는 것이 진짜 방생이라는 것입니다. 즉 중생을 다 극락세계로 인도하고 해탈, 복덕, 평화의 세계로 인도할 때, 중생은 자유로워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앞으로 말한 행복해지는 길인데 그 방법은 위에서 말한 두가지 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이 유약해질수록 환경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또 지진이 나던지 불이 나던지 상관없이 마음속에서만 만족을 얻으면 되는가 하는 문 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마음의 문제는 마음으로 해결하고 환경으로 해결할 문제는 환경으로 해결 해서 심경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불입니다. 이런 마음과 환경을 하나로 성숙시켜 나가는 것이 바로 대승불교이고 그것이 바로 도입니다.
쉬운 예를들어 주부가 음식을 만들면 그것은 가족의 건강을 도모하는 동시에 자기의 기쁨도 됩 니다. 또한 절에서 스님들이 목수일을 해서 법당을 지으면 그것이 법당을 짓는 것과 동시에 자기 수양이 됩니다. 그렇게 지은 것이 석굴암과 같은 위대한 작품이 되기도 했습니다. 스님들이 매일 글씨를 쓰는데 자기 수양을 위해서 쓸때와 작품을 만들려고 쓰는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오늘날 우리는 노동을 하는데 전혀 수양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현대인은 자기수양과 전문노동 이 일치되어야 이상적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 속에서 수양을 하는 멋을 찾아내야 합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자기도 좋고 남도 좋은 자리이타(自利利他)가 됩니다.
요즘 우리사회는 다른사람에게 이로우면 내가 손해이고 내가 이로우면 다른사람이 손해인 것이 갈등입니다. 심지어 아이를 많이 낳으면 내 인생 손해라고 아이 안낳기 운동이 일고 있습니다. 아이 키우는 것이 내 행복이고 내 행복이 아이 키우는 것이라고 동시에 생각되어야 합니다.
나도 기쁘고 이로우며 다른 사람도 기쁘게 되는 것이 진짜 행복해 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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