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암스님─ 매일아침 10분이라도 자기를 찾아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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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법명사 댓글 0건 조회 1,005회 작성일 14-06-04 15:05본문
매일아침 10분이라도 자기를 찾아 보세요
서암스님
“아침에 공기맑을때 독서하는 것은 죄악이다.” 내가 어릴적 읽었던 톨스토이의 작품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때만 해도 일제시절이라 책 빌려보기가 쉽지 않았지만 늘 책을 가까이 했지요. 왜 아침 공기맑을때 책읽는 것이 죄악일까요, 오히려 권장할 일인데 말입니다. 종일 활동하다가 잠자리에 들기전에 과거의 인간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그것을 참고하기 위해 그때 독서하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아침 그 신성한 시간에는 남의 찌꺼기를 들여다 볼것이 아니라 자기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마음에 어찌나 감명을 받았던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자기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그 말은 후에 나를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이끈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끔 보면 종교를 갖는 신행활동이 다 여가시간에나 하는 것인 줄 알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교육을 받고 철학을 연구하고 모든 종교의 문을 두드리고 하는 것들이 다 무슨 글을 배우기 위해서나 어떠한 기교를 배우기 위해서나 어느 종교를 믿기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인생을 보다 복되고 행복하게, 진지하고 평화스럽고 아름답게 살기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찰나를 살더라도 우리가 하루하루 노력해서 먹고사는 것들이 다 무엇때문일까요? 이 사는 목적을 밝히고 발견해야 합니다. 불교는 바로 그 사는 태도를 분명히 알자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이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어디 있겠습니까. 백년도 못되는 세월동안 우리는 꿈틀거리며 무한히 헤매고, 한생뿐만 아니라 또 몸 받고 몸 받는 수없는 광겁으로 생사의 파도에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생사없는 도리를 하나 밝히기 위해서 부처님이 출현하신 것이지요.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쉬운 도리를 일러 주셨지만 모두 알아차리지 못하니까 생사 없는 길에 몰아 넣기 위해 49년 동안이나 종으로 횡으로 말씀을 하신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꿈깨는 일밖에 없습니다.
불교의 핵심은 바로 꿈깨는 문제입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천하에 이보다 쉬운 법(法)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불교가 너무 어려워서 못하겠다는, 잠꼬대같은 소리들을 하지요. 가장 쉬운 이치를 두고 어렵다는 것은 겉으로 헤매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다만 1시간이나 10분이라도 딱 앉아서 자기를 반성하고 참회하는 시간을 가져보십시오.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를 응시하고 인식한다면, 그 시간은 참으로 빛나는 시간입니다. 깨치지는 못하더라도 잠깐 동안이나마 면밀히 자기자신을 적나라하게 바라보고 생각해 본다면 하루 24시간 생활하는데 큰 힘이 되고 큰 빛이 됨을 직접 경험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경북 영주에서 태어났어요. 일찍이 중농이었던 아버지께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신 관계로 안동형무소에 투옥되셨고, 집안은 파산의 운명을 겪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방랑를 하다 예천땅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민족의식에 눈을 뜬 분들이 설립한 조그마한 사립학교에서 처음으로 신학문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신문을 배달하고 밤에는 물건을 팔아 학비는 물론 집안의 살림도 도와야 했지만 육체의 고통을 정신력으로 버텨가며 와세다 대학의 강의록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늘 갖고 있는 의문점들을 많은 사람에게 질문하곤 했는데 흔쾌한 답을 얻지 못해 늘 답답했습니다. 그당시 나는 예천 서악사에 친구들과 가끔 놀러갔는데 어느날 서악사의 노스님을 만나뵙는 인연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만해도 하룻강아지 범무서운줄도 모르고 산중에 있는 중이 뭘 알까싶은 마음에 내가 아는 것을 뽐내며 대화를 시작했지요.
그런데 대화를 해보니 예전에 만났던 이들과는 달리 오히려 내 입이 꽉 막혀서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노스님은 내게 “그래, 네가 지금까지 보고, 듣고, 배운 것 다 털어내고 네소리 한번 해보아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그 소리에 ‘아!…’하며 꽉 막혀버린 것입니다. 내가 그때까지 아는 소리란 소설보고, 책보고 배운것 뿐이었습니다. 그것을 다 버리고 내안의 소리를 한번 해보라고 하니 그만 막혀버린 겁니다.
그리고 스님은 “너의 정체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셨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또 꽉 막히는 것이었어요. 물론 어머니 뱃속에서 내가 나왔겠지만 또 그 어머니는 어디서 왔냐고 소급해 물으면 또 막힐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그 노스님과 며칠간 이야기를 해보니 예사 스님이 아니구나 생각돼 스님께 중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무나 중되는 것 아니다 하시기에 며칠을 졸라 서악사 노스님 밑에서 2년 반동안 시봉을 하고 난 후, 김용사에서 화산스님을 은사로 출가를 했습니다. 출가 한 뒤 한 3년동안은 경전공부와 참선수행에 전념했습니다.
그러다가 종단의 추천을 받아 종비생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일본대학 종교학과에 입학하고서도 생계를 유지하기위해 요즘도 나오는 ‘요미우리’‘아사히’ 등의 배달도 하고, 방학때는 다음학기 학비를 마련하기위해 품팔이도 하고, 고물장사도 하고 막노동판 주방장도 하는 등 별 것을 다 했습니다.
그러다가 덜컥 폐병에 걸렸지요. 피를 토하며 쓰러진 나를 당시 같이 유학하며 옆방에 살던 故 이종익박사가 병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만 해도 폐병에 걸리면 가족들도 가까이 가기를 꺼릴 정도로 중병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그 의사에게 “내 병 고칠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의사가 “고칠 생각이 있느냐”하면서 2년간 입원해야 된다는 것이었어요. 하루살이도 힘든데 2년간 입원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고 대학 3년을 수료한 채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귀국후에 결사용맹정진을 하며 그 죽을 병마를 뛰어넘었습니다.
일제 징용이 한창이던 때에는 철원 심원사에서 후학을 지도하는 강사생활을 잠시 했었고, 금강산 유점사, 마하연, 심계사 등에서 수행했습니다. 그렇게 생활하다 보니 병이 내 몸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이날까지 살고 있습니다.
또 대승사에서는 청안스님, 청담스님, 포산스님, 우봉스님, 성철스님들과 함께 정진하기도 했습니다. 광복후 우리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울때를 두루 지나며 관리자 선방, 망월사, 청화산 원적사 등지를 떠돌며 화두를 잡고 있습니다.
화두라는 것은 본시 말씀 화(話)자, 머리 두(頭)자입니다. 아무리 짤막한 말도 말의 뜻이 다 있습니다. 뜻없는 말이 없지요. 그런데 이건 뜻이 붙지 않습니다. 일체 사량분별(思量分別)이 붙지 않는 것이 화두입니다. 가령 화두를 뭐하러 할려고 하냐고 물으면 뭐라 할것입니까? 깨닫기위해서 한다고 하겠지요.
왜 깨달으려 하냐고 물으면 뭐라 답하겠습니까?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할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은 괴로우니까 고(苦)에서 벗어나기위해 화두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49년간 설한 8만4천법문은 모두 이야기 즉, 말로돼 있습니다. 화두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옛스님들은 “어떻게 하면 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하고 제자가 물으면 방망이로 후려치기도하고, 또 벽력같은 고함을 지르기도 했지요. 그것은 이론으로는 안되니까 그런 비상수단을 이용하는 겁니다.
화두는 이론이 아닌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그 사람의 생명체에다가 침을 놓은 것입니다. 이론을 따져봐도 안되고, 백과사전을 찾아봐도 안되는 꽉 막히는 의문을 푸느라 시간 가는줄 모르고, 시간과 공간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어디 앉아 있는지도 망각해 버리고 골똘히 참구해 들어가는것, 그게 화두입니다.
하지만 화두는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화두에는 1700공안이 있는데 역시 말을 통해서 그것을 짐작할 수 있지, 말 안하면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말을 안해야 된다는 것을 또 말로써 설명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 가지고 말에 이른것. 즉, 이론에서 이론으로 끝마치는 것은 불교의 경전 즉 교학이고, 이론에서 이론이 끊어진데까지 끌어다 놓는것이 화두다 이 말입니다. 사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화두 아닌게 없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우리가 정말로 아는게 사실 하나도 없어요.
아는거 있거든 하나 얘기해 보세요. 그래 이건 연필인데 이름이 연필이지 이게 어떤 나무로 만들었는지 또 그 나무는 무엇으로 이뤄졌는지 알아요? 실제 우리는 먼지 하나도 제대로 알고 있지를 못해요.
그러나 사실 먼지 하나의 존재만 제대로 알아도 우주전체를 알아버립니다.
요새 과학에서도 소립자, 원자, 전자니 하면서 연구해 들어가는데 그것만 알아도 우주전체를 아는 것이 아닙니까? 이세상을 이루는 물질은 하나인데
-현재 하나라고 과학은 결론지어 놨는데-
하나의 먼지 입자만 봐도 제대로 아는게 하나도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꽉 막힐 수 밖에요. 참선이란 말 자체를 몰라도 인간이 진지하게 살려고만 한다면 다 화두가 되게 마련입니다.
풀 한포기 꽃 한송이를 보아도 저런 풀에 파란물이 묻어 올라오고, 빨간 꽃 봉오리가 올라오고 하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신기하지요.
누가 염색공장을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닌데, 우주에는 전부 신기한 것, 모르는 것 뿐입니다. 모르는것 뿐이라는 것은 자기가 결국 멍텅구리다 이 소리인데, 정신 바짝 차려야지 그냥 멍텅구리로 지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신 바짝 차린다는게 화두거든요.
예전에 나는 잠시 조계종 총무원장직을 맡았던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일은 내게는 영 맞지가 않았습니다. 자질이 부족했던 것이었죠. 그래서 모든 직책을 다버리고 경상북도 하북면 원적사로 내려왔어요.
그때 나는 바랑에다 흰 장갑 여섯켤레를 넣어가지고 왔어요. 총무원장으로 있다보니 각종 행사에 참석하는 일이 많았는데 가만히 보면 테이프커팅인가 뭔가 할때 한번 쓰고는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 이더라구요.
면장갑 한켤레지만 참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요긴하게 쓰려고 모아둔 것이지요. 주위 스님들이 흰장갑 여섯켤레의 사용처를 묻길래 “나무할때 쓰려고 모아왔지”했더니 다들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더군요.
요즘 너무 헤프게 삽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얼마든지 오래 오래 긴요하게 쓸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수행하는 스님들 조차 아끼고 절약한다는 생각없이 너무 풍족하지 않나 염려가 됩니다. 그렇게 원적사에 내려와서 원효스님이 머물렀다는 근처 토굴에서 솔잎을 따먹기도하고 내손으로 직접 공양을 지어 먹으며 오랜동안 수행에 전념했습니다.
오로지 철저하게 수행에만 몰두했던 그때가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가 철저한 생각이 아니고 이 세상이 조금 살만하니까 정신이 없어 그렇지, 내가 오늘을 살지 내일을 살지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바람 앞에 촛불같이 언제 꺼질지 모르는 인생인데 백년산다고 누가 보장하겠습니까.
설사 백년을 산다해도 이렇게 살아가지고 근본문제가 해결이 되겠느냐 그말이지요. 수행은 누가 하는 것이라고 해서 하는게 아니고 안한다고 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진실되게 살려면 안하고는 배기지 못하는 겁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누구한데 수행법을 배운게 아닙니다.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해서 밤중에 집을 나와서 탁 한 판 해보려니까 시원하게 자기를 가르쳐 줄 스승이 한분도 없었어요.
그러니 물을 필요가 없지요.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내가 해결해야 되겠다 그거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진지하게 살면 저절로 수행자가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도 급한 것이 내 인생을 찾는 것입니다.
머리에 불붙은 것을 끄듯이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듯이 내 인생의 참모습을 깊이 참구해 들어가 자신의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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